삼성전자가 ‘멀티LLM 기반 AI 대전환’을 전사 과제로 선언했습니다. 전담 조직을 세우고, 수만 명 임직원을 대상으로 AI 리터러시 교육을 병행한다는 내용입니다. 같은 시기 LG CNS는 Claude Enterprise를 그룹 전체에 통합 도입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또 하나의 AI 도입 뉴스’입니다. 이건 다른 신호입니다.


도구는 이미 깔려 있다

삼성SDS AX센터가 공개한 수치가 있습니다. 에이전트를 실제 업무에 활용하는 비율, 5%.

도구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접근 권한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어떤 판단을 AI에게 맡기고, 어떤 판단을 자신이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수만 명이 AI를 쓴다는 것은 수만 개의 “나는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질문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모델이 좋아진다고 이 질문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기업의 전사 AI 도입이 작은 스타트업의 도입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타트업은 쓰는 사람이 AI를 설계한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습니다. 대기업은 설계자와 사용자 사이에 조직 계층, 직군 차이, 업무 문화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 거리를 모델 성능이 메워주지는 않습니다.


진짜 병목은 역할의 경계

삼성의 ‘멀티LLM’ 접근과 LG CNS의 그룹 통합 도입에서 공통점을 하나 찾는다면, 단일 모델로 전 직군을 커버하지 않겠다는 판단입니다.

이건 기술 결정이 아닙니다. 역할 결정입니다.

법무팀이 쓰는 AI와 마케팅팀이 쓰는 AI가 다르다면, 그 차이는 모델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각 직군이 AI에게 무엇을 위임하고 무엇을 자신이 책임지는지에 대한 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계약서 검토와 카피라이팅에는 서로 다른 판단 경계가 필요하고, 그 경계는 모델이 그려주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설계하는 것입니다.

삼성SDS의 5% 문제로 돌아오면, 나머지 95%의 사람들은 그 경계가 없는 상태입니다. 무엇을 AI에게 물어도 되는지, 어디서부터 자신이 검증해야 하는지, 어떤 결과를 그대로 써도 되는지. 경계가 없는 곳에서 사람들은 AI를 쓰기 전에 먼저 불안해합니다. 불안은 활용률을 죽입니다.

이 경계를 설계하는 것이 AI 정착의 실제 과제입니다.


PM이 해야 할 세 가지 설계

기능을 만드는 것과 역할을 재편하는 것은 다른 작업입니다. AI를 ‘도입’하는 PM과 AI를 ‘정착’시키는 PM의 차이는 여기서 납니다.

정착을 설계하는 PM은 세 가지 질문을 먼저 풀어야 합니다.

어느 판단을 위임할 것인가. 드래프트 작성은 AI가 맡아도 되지만, 고객 앞에서의 최종 발언은 사람이 합니다. 이 경계를 명확히 그릴수록 활용률이 올라갑니다. PM이 해야 할 것은 “이 기능을 쓰세요”가 아니라 “이 판단을 AI에게 맡기면 됩니다”라는 위임 범위를 직군별로 정의하는 것입니다.

어떤 실패를 허용할 것인가. 수만 명이 동시에 AI를 쓰면 반드시 나쁜 결과가 나오는 사례가 생깁니다. 그 사례를 처벌 구조로 받으면 사람들은 AI를 쓰지 않습니다. 정착은 “AI가 틀렸을 때 어떻게 교정하는가”의 루프 설계에서 결정됩니다. 개선 피드백을 받을 채널, 오류 유형을 분류하는 방법, 에러에서 배운 것을 제품에 반영하는 주기. 이것이 운영 설계입니다.

학습 경로가 있는가. AI 리터러시 교육을 병행한다는 삼성의 발표가 이 지점을 가리킵니다. 수만 명이 AI를 쓰게 하려면 “잘 쓰는 사람”의 패턴을 조직이 전파하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가장 빠른 방법 중 하나는 제품 자체에 그 패턴을 내장하는 것입니다. 좋은 프롬프트의 예시를 제품 UI 안에 넣거나, AI가 잘 처리한 사례를 팀 채널에서 공유하는 흐름을 만들거나.


모델 선택이 마지막이어야 하는 이유

Claude Enterprise를 쓰든 GPT를 쓰든, 모델 선택은 역할 재편 이후의 질문입니다.

어떤 모델이 더 좋은가는 어떤 판단을 AI에게 맡기기로 했는가가 정해진 뒤에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역할 경계 없이 모델을 고르는 것은 목적지 없이 어떤 차가 더 빠른지 비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목적지가 명확하면 SUV와 세단 중 어느 것이 나은지 답이 바뀝니다. AI도 같습니다. 쓰임새가 정해지면 모델 선택은 단순해집니다.

삼성과 LG CNS가 전사 단위로 움직인 것은 그 순서를 밟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수만 명이 쓰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결정이 먼저입니다. 어떤 판단을 AI에게 넘기고 어떤 판단을 사람이 쥐는지에 대한 설계가 그 다음입니다. 모델은 그 이후에 있습니다.

한국 대기업이 AI 정착에서 실제로 실험하고 있는 것은 이 순서입니다. 실험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는 3~6개월 뒤에 보이겠지만, 방향은 맞습니다.


마치며

도구를 깔고 나면 바뀌는 것이 없다는 경험을 많은 팀이 했습니다. 도구를 깔기 전에 역할을 다시 그려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배웁니다.

삼성과 LG CNS가 전사 단위로 이 순서를 실험하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AI 정착의 과제가 더 이상 기술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신의 팀에서 AI 활용의 경계는 명확히 그려져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 모두가 “어디까지 써도 되지?”를 혼자 계산하고 있습니까?